FDE라는 단어가 자꾸 보여요 — AI 시대의 직업 불안에 대한 조금 다른 독법
한 달 사이에 같은 단어를 여러 번 만나면, 한 번쯤 들여다볼 이유는 되는 것 같아요. 요즘 제게 그 단어는 FDE예요. Forward Deployed Engineer, 풀면 "고객 현장에 나가 앉는 엔지니어" 정도가 될 거예요. 최근 4주간 제가 저장한 커리어 관련 영상 30건 중에 이 직함을 다룬 게 여러 편이었어요. 로드맵을 그려주는 영상까지 나왔더라고요. 물론 제 시청 기록이 만든 편식일 수 있어요. 다만 적어도 제가 읽고 있는 AI 커리어 담론 안에서는, 분명히 반복되는 이름이었어요.
다리를 놓는 사람
FDE는 팔란티어가 개척한 것으로 알려진 직함이에요. 본사에서 제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, 고객사 현장에 들어가 앉아서 그 회사의 문제에 맞게 시스템을 설계하고, 구축하고, 돌아가게 만드는 엔지니어. 요즘은 AI 회사들이 같은 이름의 채용 공고를 내고 있어요. 말하자면 기술과 현장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에요.
이 직함이 다시 호명되는 이유를 생각해봤어요. 모델의 능력에 비해, 각 회사의 업무는 더디게 바뀌어요. 그 사이에 간극이 있어요. 배포와 보안, 조직의 관성 같은 문제도 있지만, 제 눈에 제일 커 보이는 건 맥락이에요. 이 회사는 어떤 용어를 쓰고, 어떤 규정이 있고, 어떤 데이터가 어디 묻혀 있는지. 이걸 아는 사람이 붙어야 비로소 돌아가요. 그 간극을 메우는 역할에 붙은 이름이 FDE인 거죠.
불안의 문법을 뒤집으면
AI 커리어 콘텐츠의 문법은 대개 "대체"예요. 어떤 직업이 사라지는가, 살아남으려면 뭘 배워야 하는가. 저도 그 불안을 몰라서 하는 얘기는 아니에요.
그런데 FDE라는 이름이 다시 불리는 현상은 그 문법을 조금 뒤집어요. AI를 만드는 능력이나 개별 작업 능력만큼, 어쩌면 그보다 더 귀해지고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니까요. 내가 속한 현장의 맥락을 AI가 쓸 수 있는 형태로 옮기는 능력이요. 우리 팀은 왜 이 순서로 일하는지, 이 문서와 저 문서 중 어느 쪽이 정본인지, 어떤 실패가 반복돼왔는지. 이런 건 모델 안에 없어요. 현장에 있는 사람 안에 있어요.
이렇게 보면 유리한 사람이 조금 달라 보여요. 최신 모델을 제일 잘 아는 사람만이 아니라, 자기 일의 구조를 제일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요. 도구는 계속 바뀌니까 도구 지식은 감가가 빨라요. 반면 "우리 일이 실제로 어떻게 굴러가는가"에 대한 이해는 감가가 느린 것 같아요. 번역할 원문을 가진 사람이 번역기의 수혜를 제일 크게 받는 것처럼요.
자기 자리에서 반 발짝
그래서 저는 FDE 열풍을 "저 직업으로 갈아타라"는 신호로 읽지 않아요. 자기 자리에서 반 발짝만 움직이라는 신호로 읽어요.
지금 하는 일을 그대로 하되, 그 일의 절차와 판단 기준을 글로 적어보는 것. 반복되는 업무 하나를 골라 AI에게 시켜보고, 실패하면 무엇이 부족해서 실패했는지 기록하는 것. 물론 이것만으로 FDE가 되는 건 아니에요. 저 직업의 실체는 시스템을 설계하고 배포까지 책임지는 무거운 엔지니어링이니까요. 다만 방향은 가져올 수 있어요. 그 기록이 쌓이면, 그게 바로 내 현장과 AI 사이의 다리가 되니까요.
대체될까를 묻는 질문은 저를 자꾸 관객석에 앉혀요. 다리를 놓을 수 있나를 묻는 질문은 저를 공사장에 세우고요. 같은 불안이라도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다음 행동이 달라져요. 저는 공사장 쪽에 서기로 했어요.
이것 저것 AI와 사는 이야기를 공유합니다. 목요일마다 보내드리고, 그 사이에 나눌 이야기가 생기면 한 번 더 찾아뵐게요.
